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자파힛 제국 (문단 편집) === 명나라의 개입 === [[파일:Muslim-explorer-Zheng-He.jpg|width=600]] [[정화(명나라)|정화]]의 대함대. [[명나라]]가 정화를 통해 [[믈라카 술탄국]] 등 이슬람 세력들을 도와주고 마자파힛 제국을 견제하면서 힌두계 마자파힛 제국은 치명타를 입었다. 참고로 위크라마와르다나 왕 시절의 마자파힛 제국이 치명타를 입은 예상치 못한 이유에는 '''[[명나라]]'''라는 초대형 변수가 존재했다. 동마자파힛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일부러 저멀리 중국의 명나라와도 친교를 맺으려 시도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동마자파힛을 방문하려 시도했던 인물이 [[정화의 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명나라)|정화]]'''다. 정화는 명나라 사신단을 동마자파힛으로 보내 조공을 받으려했는데, 이 과정에서 명나라 사신단이 예상치 못하게 내전싸움에 휩쓸리면서 170여 명의 중국인들이 살해당했던 것. 보고를 전해들은 [[영락제]]는 격노했고 6만 타힐의 금을 요구했지만 내전으로 돈이 쪼달리던 위크라마와르다나 왕이 지불 가능한 액수는 기껏해야 1만 타힐이 한계였다. 영락제는 후일 배상금을 깎아주었지만 그 사건으로 마자파힛 제국의 위신에 치명타를 입은 건 변하지 않았다. 명나라 대함대를 이끌던 정화는 꾸준하게 마자파힛 제국에게 타격을 입혔다. 당시 말레이 반도 중계무역의 최고 중심지인 [[믈라카]] 지방도 이때 떨어져 나갔다. 당시 믈라카 지방에는 [[스리위자야]] 왕족의 후손을 자처하던 싱아푸라 왕국의 마지막 왕 파라메스와라가 자리를 잡고 [[믈라카 술탄국]]을 막 세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존에 믈라카 일대를 지배하던 마자파힛 제국 측에서는 파라메스와라의 행동이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기막히게 나타난 인물이 명나라와 정화였다. 마자파힛 제국에서 떨어져나갈 기회만을 노리던 믈라카 술탄국은 정화에게 막대한 선물을 안기면서 중국의 호의를 샀고,[* 사실 믈라카 술탄국 이전에도 믈라카 일대를 다스리던 [[팔렘방]] 측에서는 꾸준히 중국 쪽에 로비를 시도했다. [[명나라]] [[주원장]]에게 사신을 보내 옛날 스리위자야 왕국이 그랬던 것처럼 조공을 바치고 보호를 요구하기도 했던 것. 하지만 이때는 마자파힛 제국이 쌩쌩히 살아있을 시기였고, 마자파힛 제국이 믈라카 일대를 속국으로 선언하고 중국의 개입을 사전차단하면서 먹히지 않았다.] 그 대가로 마자파힛 제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얻어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정화가 [[팔렘방]] 일대의 화인(華人) [[무슬림]] 세력의 독립마저도 지원하면서 마자파힛 제국의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영향력은 확연히 줄어들고야 만다. 사실 꾸준하게 동남아시아 정세에 관여하며 '''명나라가 마자파힛 제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킨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당대 마자파힛 제국의 해상 패권이 지나치게 강력했기에 명나라가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던 것도 있었다. 정화의 함대와 중국의 막대한 지원을 통해 들어선 [[믈라카 술탄국]]의 위세가 강해지며 인도네시아 일대에 [[이슬람]]의 유입이 일어났고, 명나라가 수마트라 섬 북부에 일부러 무슬림-중국인 커뮤니티들을 우후죽순 박아놓고 개종시키면서 힌두 마자파힛 제국의 입지는 날로 좁아졌다. 명나라가 개입한 이후 마자파힛 제국은 [[팔렘방]], 잠비, 인드라기리 등 옛 스리위자야계 도시들 몇 개를 제외하면 수마트라 섬 대부분에서 세력을 잃고 쫒겨났다. 1430년대 들어서는 심지어 마자파힛 제국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자바 섬]] 북부인 [[스마랑]], 드막, 투반, 암펠 등지에도 중국계 무슬림들의 거주지가 생겨났다. [[무슬림]]들의 세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마자파힛 제국의 국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내전에 시달리며 마음고생을 하던 위크라마와르다나 왕이 1429년에 사망하자 왕위는 딸 수히타(재위 1429-1447)에게 넘어갔다. 수히타는 옛 동마자파힛의 반란자 위라부미 공의 딸이 낳은 두 번째 왕녀 출신으로, 1427년에는 이스칸다르 샤와 결혼했다. 이스칸다르 샤의 형제이자 [[클란탄]] 지방의 술탄이던 사디크 무함마드 샤가 1429년 죽자 이스칸다르 샤가 클란탄의 왕위를 물려받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수히타의 치세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게 없다만 굳이 꼽자면 '블람방안' 지방이 마자파힛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등이 있다.[* 자바 동부에서 유명한 설화 <다마르 울란> 영웅담은 구전으로 이어졌고, 근세 이래 다양한 기록과 예술 작품으로 남아 있다. <다마르 울란> 영웅담의 배경이 바로 수히타의 치세에 벌어진 중앙 정부와 블람방안의 대립이다.] 수히타는 1447년 사망했고 그녀의 남동생 크르타위자야가 왕위에 올라 1451년까지 다스렸다. 크르타위자야가 별 업적 없이 1451년 죽자 라자사와르다나가 새 왕으로 즉위해 1453년까지 마자파힛을 다스렸지만 그 역시 별다른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